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기초사료입니다
고려 인종의 명령을 받아 편찬 책임자인 김부식을 포함 총 11명이 집필에 참여한 관찬 역사서로 그 범위는 삼국시대로부터 통일 신라를 거쳐 후삼국시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연 주역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 대한 역사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입장에서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열전과 같은 별도의 장을 마련해 발해사를 남겼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을 텐데요
거기다 고구려의 정신인 천손개념을 명확하게 승계한 유일한 나라가 발해임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김부식은 왜 발해에 대한 역사기록을 완전히 빼버렸을까요?
신라 정통론에 발해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대부분의 역사 교양서에는 김부식이 신라 정통론을 계승한 사대주의자이기 때문에 발해사를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고구려 중심의 역사서 삼국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새롭게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가 바로 신라중심의 역사로 바꿔놓기 위해서라는 주장이지요
본관이 경주인 김부식은 고려왕 순종이 신라 외손으로 이후 고려의 왕통은 모두 신라 외손의 혈통이라고 말한 바 있을 만큼 신라 정통론자였습니다
거기다 신라의 당에 대한 충성심을 소개하고 사대야 말로 신라 국조의 장구를 보장해 주었다는 사대주의 논리를 피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실제 김부식은 중국을 차지한 금나라에도 사대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묘청, 정지상 등 서경파와 정치적으로 크게 반목하기도 했었지요
특히 신라본기 마지막에 붙인 김부식의 사론은 신라의 왕통과 정통성이 자연스레 고려로 이어졌다는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신라는 번성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사대적 역사관이 삼국사기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인데요
당나라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면서 졸렬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부식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역사를 열전에서조차 거론하지 않은 것입니다
발해에 대한 고려왕실의 역사 인식 부재
고려는 발해가 멸망하기 전에 건국된 나라로 발해가 멸망했을 때 유민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동족의식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태조 왕건이 거란이 보내온 낙타들을 만부교에 묶어 아사시키고 사신을 귀양 보낸 만부교 사건이나
발해의 태자였던 대광현을 환대하고 왕계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해 백주땅을 다스리게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특히 후사를 잇다라는 뜻을 가진 계를 이름으로 하사한 것은 대광현에게 발해의 정통을 고려에서 이어나가게 한 것이라는 해석이 통설이지요
중국 사서인 자치통감은 고려와 발해 사이에 혼인관계에 대한 기록을 남겨 두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대광현에게 하사한 백주땅이 왕건 세력의 근거지인 패서지역임은 이들의 관계가 두터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이나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발해유민들이 고려에 내 투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대우가 좋았음도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그런데 고려와 거란사이에 벌어진 세차레의 전쟁을 거치면서 요나라와 평화 관계가 정립된 이후 고려왕실은 발해유민들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이 강해 북진정책을 펼쳤던 고려왕실이 거란과의 평화협정을 계기로 신라의 정통성을 승계했다는 역사인식이 팽배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설총을 홍유후, 최치원을 문창후로 추봉 했을 뿐만 아니라 원효와 의상을 국사로 추봉해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파격을 보여줍니다
고려사회를 지탱하던 유교와 불교는 모두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인식이 대세를 장악하게 된 것인데요
북진을 포기한 고려왕실과 김부식이 굳이 발해를 염두에 두었을까요?
여진의 흥기와 발해
발해 멸망 이후 발해인들 대부분은 거란의 영역에 거주했지만 반 거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와 거란이 사이좋게 지내면서 발해인들은 고려와 거란 양국의 견제를 받게 되는데요
12세기경 여진이 강성해지면서 국제정세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거란에 적대적인 발해인들을 여진이 적극적으로 끌어드리면서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집안임을 강조한 것이지요
결국 금나라 건국에 협력한 발해인들은 여진과 함께 군사행동을 하며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내는데 일조하는데요
고려 조정을 장악한 유교사관에 입각한 사대주의자들에게 발해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치원의 글이나 고려도경 고려사절요등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발해말갈이라는 중국식 명칭을 김부식이 처음 사용한 연유이지요
여진과 붙어먹은 발해인들을 말갈로 인식한 김부식과 같은 사대부들은 발해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발해사가 통째로 빠져있는 이유이지요
유교사관의 정립
고려는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정변등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국가주도세력이 계속 바뀌는 불안한 정세를 보입니다
특히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 등 사대주의적 성향을 지닌 유학파가 고려조정을 장악했는데 이때 편찬된 역사서가 삼국사기입니다
실제 서경파가 주도한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조정을 장악한 세력이 과거를 통해 출사 한 유학파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구려 계승의식에 충실했던 서경파와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가진 유학파들의 한판승부가 바로 묘청의 난인 셈이죠
유교사관에 입각한 김부식 일파는 고구려 승계의식에 매몰된 서경이 중심이 된 패서출신과 다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고려는 발해를 통해 정통성을 세울 수 없었는가
옛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 성을 근거로 하였으니
측천무후 원년 갑신년에 개국하여 발해라 이름 지었다
우리 태조 8년 을유년에 온 나라가 연달아 왕경에 내조하였으니
누가 능히 변한 것을 알고 먼저 귀부 하였던고
예부경과 사정경이었네
건국한 지 242년이며 그 사이에 몇 명의 왕이 능히 수성할 수 있었는가?
삼국사기는 발해의 역사를 철저히 무시하였으나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실린 발해기는 발해를 통해 고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승휴는 발해기를 쓰면서 발해의 마지막을 거란에 의한 멸망이 아닌 고려에의 귀부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발해를 흡수한 주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발해태자나 여러 고위관료들이 귀부 했다는 점을 들어 고려의 위엄과 정통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김부식과 다른 역사인식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