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별로 쓰지 않는 말이지만 베이비 세대가 왕성하던 시절 자주 쓰던 말이 있습니다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라는 말인데요
대개 아이들을 어르거나 놀릴 때 사용했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다리는 사람의 몸통아래 붙어 있던 신체의 일부분을 가리키거나
강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시설물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라는 말속의 다리는 시설물인 다리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특정지역에서 사용하던 말이 아니라 전국 대부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다리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 유래되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두 개의 출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역 민속지인 경북 영주시의 옛 지명인 순흥 청다리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며
또 하나는 조선중종 때 유학자인 성현의 용재총화에 기록된 청계천 다리밑이라는 기록입니다
순흥 청다리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
영주시 지역 민속지 선비의 고장을 보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유래에 대한 두 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축지변과 관련된 기사인데요
계유정난을 승리로 이끈 수양은 동생인 금성을 순흥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금성대군은 유배지에서 단종복위를 위한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돼 죽임을 당하는데요
역모에 가담한 수백 명의 선비들과 가족들이 순흥 청다리 아래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정축지변이라 기록된 금성대군 역모사건에서 살아남은 몇몇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요
이 몇몇 아이들을 관군이 서울로 데려가 키운 데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사건때문에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전국으로 퍼졌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던 소수서원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소수서원에 기숙하던 유생들이 청다리 건너 저잣거리에서 기녀들과 질퍽하게 놀았기 때문에 아기가 자주 생겼다고 합니다
불장난으로 생긴 아이들은 청다리 밑에 버렸는데 마을 사람들이 아기를 데려와 키웠다는 기록입니다
이런 일은 순흥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한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청계천 다리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
용재총화는 성현이 한양에 거주하면서 보고 느꼈던 백성들의 삶과 시대상황을 야담으로 기록한 책인데요
여기에도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청계천은 수도 한양의 젖줄역할을 하던 물줄기였습니다
기사에는 단오와 같은 대규모 축제가 벌어지면 서로 눈 맞은 청춘남녀가 사통을 하다 아이가 자주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렇게 낳은 아이들을 버리는 곳이 청계천 다리밑이었며 다리밑에선 버려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인데요
다시 말하면 원치 않은 아이를 낳을 경우 청계천 다리밑에 유기한 것입니다
버려진 아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던 조선조정은 이를 해결할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아이를 데려다 키운 사람에게 국가가 포상을 하고 상평창을 통해 곡식을 나눠주는 제도입니다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청계천 다리밑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죠
정약용이 편찬한 목민심서에는 이 제도로 구제받은 아이가 3,80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옹재총화와 목민심서에 나온 기록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특정지역이 아닌 전국적으로 사용된 말이기 때문인데요
사통 유기 불륜과 관련되었기 때문이 좋은 의미로 사용된 말은 아닙니다
이런 말은 안 쓰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