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 17, 고구려 본기 5
동천왕조 8년 가을 태후 우 씨가 돌아가셨다.
태후는 임종에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
내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
마침내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무당이 말하였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 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고국천왕)의 능 앞에 일곱 겹 소나무를 심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두 명의 왕을 모신 왕후로 기록이 남아있는 인물이 바로 왕후 우 씨다
그런데 천년이 지난 조선조 사대부들은 왜 왕후 우 씨를 악녀로 평가하며 비난했을까요?
왕후 우 씨는 누구인가
서기력 160 - 165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왕후 우 씨는 고국천왕 2년 왕후에 오른다
기록에는 절노부의 수장인 우소의 딸이라고 전해지는데
전통적으로 연나부에서 더 많은 왕후가 나왔던 것을 보면 권력싸움이 치열했던 듯합니다
고국천왕 12년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 가 권력을 남용하자 왕이 제지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왕후에 대한 해석이 갈리지만 우 씨라면 절노부와 왕후 우 씨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 을파소나 안류와 같은 비주류 출신이 권력을 잡고 선정을 베푼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을파소는 민초들에 대한 구휼책인 진대법을 처음 실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죠
197년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후 우 씨는 왕의 아랫동생인 발기를 찾아가 후사를 논하려 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형수의 행동을 불쾌해하며 철저히 외면하는데요
왕이 멀쩡이 살아 있는데 후계자 문제를 논하는 것은 역모에 준하는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러자 왕후 우 씨는 발기의 동생 연우를 찾아가 왕의 승하소식을 알리자 연우는 예를 다해 맞이합니다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왕후 우 씨와 왕위를 차지하려는 연우가 정치적 파트너로 연합한 것이죠
당시 상황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위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우 씨를 대접하던 연우가 고기를 썰다 칼에 베이자 우 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왕궁에 돌아왔다
고국천왕의 상태를 잘 알고 있던 우 씨는 이미 연우를 정치적 파트너로 낙점하고 후사를 준비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인데요
이후 왕위계승서열이 앞섰던 발기를 제치고 연우가 왕위를 계승하는데 그가 바로 10대 왕 산상왕입니다
서열이 밀리는 연우를 국왕으로 세워 킹 메이커로서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왕후 우 씨의 승부수가 성공한 것이죠
요동으로 도망친 발기는 공손도에게 3만 명의 병력을 빌려 반란을 일으키지만 연우의 동생인 계수에게 진압당합니다
우 씨 덕에 왕위를 계승한 연우는 다시 장가들지 않고 그대로 우 씨를 왕후로 맞아들이는데요
이는 고구려인들의 전통인 형사취수제를 수용한 것으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후 평가
그런데 천년이 지난 후 조선조 사대부들은 왜 왕후 우 씨를 비난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성리학에 매몰된 유학자들이 고구려인들의 전통인 형사취수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들도 낳지 못한 주제에 왕이 후궁을 들여 후사를 보는 일을 방해하고 질투한 우 씨의 도를 넘는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능독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여성이라는 평가도 많습니다
평가와는 별개로 파란만장하게 70여 년을 살았던 왕후 우 씨는 고구려사에 족적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중 한 명입니다